뿌리 깊은 나무 

 

우거진 숲길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는 류진오의 작업이다. 여자에서 남자로 ‘젠더 트랜지션’을 진행한 그가 누드 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몸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에디터 | 박이현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The Creature)’은 정체성 때문에 힘겨워하는 괴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고통은 그의 생애가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여러 시체를 짜깁기한 몸, 삶과 죽음이 뒤 엉켜있는 몸을 가진 그에게 혼란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이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알려진 이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과학 문명이 낳은 부작용, 혼종성과 타자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인용되어 왔다. 오늘날 ‘괴물’이란 단어는 인간 사회가 ‘외부’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존재들’을 비판할 때 사용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사회 담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비난하는 욕설로 자리매김한 것이 대표적이다. 

 

류진오는 지난 7월 런던에 위치한 영국박물관에서 선보인 작업 <TRANS/PLANT>에서 직접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연이 보여주는 예상 밖의 모습 중, 독특한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전개해나가는 나무를 배경으로 누드 작업을 한다. 그리고 묻는다. ‘자연으로부터 배척된 자들이 자연에 소속감을 주장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라고. 스스로 ‘괴물이라면 괴물인대로 자연의 한 얼굴일 수 있어 즐거운 작가’라 말하는 류진오는 ‘젠더 트랜지션(gender transition, 개인이 인식하는 성별 정체성을 공적으로 긍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노력[법적, 사회적, 의료적])’을 진행한 작가다. 성장 과정에서 그는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에  거주했던 각 국가의 젠더문화 - 짧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군인으로 간주되는 한국,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한 요구가 적은 중국 상하이, 인종마다 다른 젠더 선입견이 있는 미국 - 에 영항을 받았다고 한다. 위와 같은 다층적 경험들은 그에게 젠더를 포함한 삶의 여러 분야에 불투명한 정체성을 선물했다. 

 

류진오는 단일한 뿌리의 부재에 대한 고민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 산을 찾았다. 명백한 소속감이 있는 것들에 대한 질투심을 나무에 표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질투심은 죽은 나무 몸통에 어린 나무 여러 그루가 뿌리를 내린 장면을 본 이후 사라졌다. 류진오에게 소속감이란 먼저 몸이 몸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는 데에서 기인한다. 자연에서 자신의 모습을 시각적 비유의 형태로 발견한 그는 기존에 갖고 있던 특정 삶에 대한 동경과 집착을 차츰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기근(氣根, Aerial root, 뿌리가 땅속에 있지 않고 밖으로 삐져나와 기능을 수행하는 뿌리)을 갖고 있는 맹그로브 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정신적 지주로 생각한다. 이들이 공중에서 뭍으로 뿌리를 내리는 방식과 비슷하게 류진오 역시 자신이 닿아온 그리고 앞으로 닿게 될 모든 것이 자신을 지탱해줄 뿌리가 되어 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류진오의 작업에서 나체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옷이라는 사회적인 피부를 벗어던지면, 몸은 장소가 자아내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해석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주체성을 최소화하고자 얼굴을 땅에 묻은 채 촬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에 관해 류진오는 ‘체화(體化, Embodiment)의 난’을 그리는 일이라 말한다. 개인이 가꿔온 정체성이건, 사회적으로 지정받은 정체성이건 이 둘은 반드시 변화를 겪게되어 있다. 그의 작업은 생과 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새로운 정체성에 진입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난처함을 보여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변화를 반복해야하는 인간의 숙명과 이에 따른 심신의 희로애락도 상징한다.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건 독특한 몸짓이다. 편중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형상화 된듯하다. 그는 밀물과 썰물이 결코 거부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정체성에 변화의 파도가 들이닥치면 매번 온 힘을 다해 서핑하는 것이 각자가 따를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닐까 묻는다. 

 

드론을 이용한 최신 작업 <Train of thought>도 비슷한 맥락이다. ‘Train of thought’는 ‘잃어버리다’를 의미하는 동사 ‘lose’ 의 과거형과 함께하는 영어 숙어다. ‘I lost my train of thought’ 는 본인이 말하려 했던 것을 잊어버린 상황에서 주로 사용된다. 녹슨 기차 옆에 누워있는 나체는 어디로든 가야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는 방황을 나타낸다. <Train of thought> 역시 ‘몸에 본질적인 의미란 없다.’로 귀결된다. 류진오는 적확하고, 명확한 몸이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나체와 나무를 이용해 나타낸다. 이는 우리 삶에 정도가 없음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뿌리 내릴 자유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이 정해놓은 길, 권력이 강요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고 타당한 삶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 2020 by KAHN J. RYU